1992년 초여름 우리별1호

1일 전 or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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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초여름 우리별1호 개발팀이 최순달 교수(두 번째 줄 가운데)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KAIST 제공“와, 성공이다. 박사님 축하합니다.” 1992년 8월 11일 오전 프랑스령 기아나 쿠루 우주기지센터.세계 22번째로 과학위성 우리별 1호기 발사에 성공하자 최순달 당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소장에게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우리별 1호 발사 성공까지 과정은 험난했지만 결과는 위대했다. 우주를 향한 최순달 박사와 젊은 과학자들의 꿈이 우리별 1호 발사 성공이라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최 박사는 당시 감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그 순간은 내 삶 전체를 통해 가장 빛나는 기억으로 뇌리에 각인돼 있다. 내가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신에게 그때의 일에 감사를 드린다.”(48년 후 이 아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립니다)한국 인공위성의 개척자이자 아버지로 불리는 최 박사는 대구공고와 서울대 공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유학길에서 올라 버클리대 학사와 석사, 스탠퍼드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휴렛팩커드 연구원과 캘리포니아 공대 부설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JPL)에서 근무했다. 귀국 후 금성사 초대 중앙연구소장,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ETRI) 초대 소장을 거쳐 전두환 정부에서 체신부 장관을 지냈다. 이어 한국과학기술대학(KIT, 현 KAIST) 초대 학장, 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과학기술계 원로임에도 최 박사는 1989년 봄 KIT 평교수로 돌아왔다. 그는 연구과제로 인공위성을 선택했다.최 박사가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우주기술은 국가 발전의 필수라고 생각했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대학에서 인공위성 연구와 개발을 시작했다. 젊은 두뇌가 사명감을 발휘해서 전력투구할 때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인공위성 계획 제안자인 나부터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JPL 근무 경력도 오래전 일이고, 그동안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최 교수는 과학기술 잡지를 통해 영국 2개 대학에서 위성설계와 분석 강좌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우샘프턴대에서 위성체 관련 단기강좌를 1989년 7월 16~21일, 서리대가 탑재체 공학과 통신위성에 관한 단기 강좌를 7월 23일부터 1주일 동안 연다는 기사였다.최순달 교수는 직접 강좌에 참석기로 했다. 한국과학재단에서 해1992년 초여름 우리별1호 개발팀이 최순달 교수(두 번째 줄 가운데)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KAIST 제공“와, 성공이다. 박사님 축하합니다.” 1992년 8월 11일 오전 프랑스령 기아나 쿠루 우주기지센터.세계 22번째로 과학위성 우리별 1호기 발사에 성공하자 최순달 당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소장에게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우리별 1호 발사 성공까지 과정은 험난했지만 결과는 위대했다. 우주를 향한 최순달 박사와 젊은 과학자들의 꿈이 우리별 1호 발사 성공이라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최 박사는 당시 감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그 순간은 내 삶 전체를 통해 가장 빛나는 기억으로 뇌리에 각인돼 있다. 내가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신에게 그때의 일에 감사를 드린다.”(48년 후 이 아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립니다)한국 인공위성의 개척자이자 아버지로 불리는 최 박사는 대구공고와 서울대 공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유학길에서 올라 버클리대 학사와 석사, 스탠퍼드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휴렛팩커드 연구원과 캘리포니아 공대 부설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JPL)에서 근무했다. 귀국 후 금성사 초대 중앙연구소장,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ETRI) 초대 소장을 거쳐 전두환 정부에서 체신부 장관을 지냈다. 이어 한국과학기술대학(KIT, 현 KAIST) 초대 학장, 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과학기술계 원로임에도 최 박사는 1989년 봄 KIT 평교수로 돌아왔다. 그는 연구과제로 인공위성을 선택했다.최 박사가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우주기술은 국가 발전의 필수라고 생각했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대학에서 인공위성 연구와 개발을 시작했다. 젊은 두뇌가 사명감을 발휘해서 전력투구할 때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인공위성 계획 제안자인 나부터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JPL 근무 경력도 오래전 일이고, 그동안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최 교수는 과학기술 잡지를 통해 영국 2개 대학에서 위성설계와 분석 강좌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우샘프턴대에서 위성체 관련 단기강좌를 1989년 7월 16~21일, 서리대가 탑재체 공학과 통신위성에 관한 단기 강좌를 7월 23일부터 1주일 동안 연다는 기사였다.최순달 교수는 직접 강좌에 참석기로 했다. 한국과학재단에서 해외연수 경비와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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